#. “왜 자꾸 헤실헤실 거려?” 참다못한 석진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남준을 향해 물었다. “왜냐니…너만 보면 웃음이 나오는걸.” “…어디 가서 그런 미친 소리 하지 마.” 사실인데…. 남준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남준은 석진보다 한 학번 아래의 후배다. 처음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주변 친구들의 씨씨니 뭐니 여친 한번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냐, 대학은 여친 사귀러 오는 거다. 이런 얘기들은 남준에게 익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캠퍼스를 지나던 석진과 마주쳤고 그 자리에서 남준은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게 됐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무리 석진이 거절하고 매몰차게 굴어도 굳건하게 매달리는 남준에 이젠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갈 정도가 되었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 “으아앙~! 엄마!” “왜 또 싸우고 그러니. 또 정국이 네가 형 괴롭혔어?” “진형은 울보야! 맨날 울기만 해! 꾸기는 아무것뚜 안 했단말이야!” 넓지만 지나다니는 차량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를 가로지르면 바로 보이는 가파른 오르막길은 정국과 석진의 놀이터였다. 시골마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도시라고 하기에도 뭐 한 애매한 위치에 살고 있는 두 형제는 언제나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매번 싸우고 때리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몇 시간, 아니 몇 분만 지나면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금세 서로를 보며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둘은 동네에서 유명인사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 앞니 두 개 빠진 전정국과 매번 눈꼬리에 방울방울 눈물을 매달고 다니는 김석진. 둘은 이복형제였다. . . . ..
# “우리 이번에도 또 같은 반이네.” 석진이 웃으며 남준에게 말했다. 예쁘게 접히는 석진의 눈꼬리에 남준이 볼에 콕 박힌 보조개를 드러내며 따라 웃었다. “그러네.” “이러다 고등학교 3년 다 너랑 보내겠다.” “난 좋은데. 넌 싫어?” 갑작스런 남준의 물음에 당황한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나는 그냥 한 소리지…. 말랑한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 툴툴거리는 석진의 모습이 여간 귀여워 보일 수 없었다. 어릴 때 버릇이랍시고 그 말랑한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낸 남준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석진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면 말고ㅡ.” 쾅쾅ㅡ “자, 출석 번호 순서대로 앉을 거니까 호명하면 자리 찾아서 앉아라.” 담임선생님의 말에 남준과 석진이 번갈아가며 눈을 맞췄다. 작년..
#. "싫어!" 정국이 별안간 생떼를 쓰며 고집을 피웠다. "정국아." "싫다구! 형아 그거 거짓말이잖아!" 있는 눈물, 없는 눈물 퐁퐁 흘려가며 울어대는 정국 탓에 석진이 난감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정국아. 진짜야. 정국이가 떡국 딱 열 개만 더 먹으면 형이 데리러 올게, 응?" 석진의 애원 아닌 애원에 정국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진짜루?" "진짜로." "거짓말 아니고?" "응. 거짓말 아냐." "형아 꾸기랑 약속한 거야. 잊어버리면 안돼." 정국이 내민 손가락을 석진이 제 새끼손가락으로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절대 안 잊고 있을게." "진형. 이제 가야 돼요." 태형이 석진의 이름을 부르며 재촉했다. 그에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국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있..
#. "혼자 왔어요?" "왜요?" "우울해 보이길래." 쿵쾅거리는 클럽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던 지민이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던 석진을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네. 혼자예요." "차였구나." 지민이 오른손에 들고있던 칵테일을 홀짝 마시며 석진에게 말했다. "…." "아이고. 딱 맞춰 버렸네…." 그렁그렁 차오르는 석진의 눈물에 지민이 제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며 석진에게 사과했다.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저도 울 생각은 없었어요." 지민에게 건네받은 티슈로 눈가를 닦아낸 석진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지민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짓자, 석진이 뭐가 그렇게 즐겁냐며 지민에게 물었다. "왜 차였는지 궁금해져서요." "그 쪽이 무슨 상관이에요." "이미 말도 텃는데 그냥 얘기해 ..
#. [ pm 6:13 형이랑 말하기 싫어요. ] 석진이 제 핸드폰에 찍혀있는 문자메세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요?" 친한 동생 남준의 물음에 석진이 턱을 괴고는 남준에게 물었다. "남준아. 너 같으면 애인이랑 싸웠을 때 어떻게 풀거야?" "저요? 저 같으면 대화로 풀죠." "걔가 거부하면?"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저는 대화로 푸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석진의 물음에 남준이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며 말했다. "…대화가 싫으면 어쩔 수 없는건가…." "…그거 형 얘기예요?" 눈치빠른 남준이 석진에게 묻자 석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남준이 석진의 휴대폰을 고개로 가르키며 태형의 이름을 부르..
솜사탕처럼 달다고하던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식감이 아주 감칠맛난다고 하던가. 맛봐볼까하면 녹아 없어져 조금 더 맛보고싶게 애간장을 태우는 솜사탕은 마치 김석진이란 사람을 비유한 음식같았다. #. "김석진이구요. 한 학년밖에는 함께하지 못하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너를 만났을 때는 고등학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고3이라는 타이틀을 갓 달았을 때였다. 다들 너의 전학생이라는 꼬리표에 너나 할 것 없이 구경을 했더라지만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 때에 나는 딱히 친구에게 많이 애정을 쏟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게 말을 걸어왔었다. "안녕?" "으웅…." 잠에 취해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지민이 답했다. "네가 지민이야?" "으…응?" 지민이 낯선 목소리에 웅크..
* 댕 댕 댕 ㅡ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아ㅡ 늦으면 큰일이 나고 말거야. 정국이 헐레벌떡 바쁜 걸음으로 집을 향해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12시 4분이 되기 1분 전인, 3분에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전정국! 지금이 몇신데 이제 들어와?" "…죄송합니다." "정신머리가 있는거야, 없는거야? 내가 미리미리 다 끝내놓라고 했지? 됐고, 얼른 밀린 빨래나 하도록 해!" 정국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던 계모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방을 나섰다. 조용히 빨래가 담긴 통을 어깨에 들춰 맨 정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언제쯤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정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버지께서는 새어머니와 언니들이랑 잘 지내라고 하셨..
* 너는 늘 같은 흰색 운동화만 고집했다. 이유를 물어보면 항상 같은 대답이었다. '무슨 색을 갖다 붙이든 다 어울리잖아.' 하고. 언젠가 네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목표를 가지게 된게 언제부터인지는 묻지 않아 모르겠지만 이미 그 꿈은 이룬게 아닐까. 너는 어딜가든 사랑받는 아이였으니까. 맨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나는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었다. 네 주위만 환하게 빛이 비췄었거든. 처음 네가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도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목소리가 너무나도 고와서 심장에 무리가 왔었기 때문에.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너는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근데 있지, 태형아. 나는 그 중에서도 네가 ..
데자뷰 :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 또 다른 말로는 무의식에 의한 행동이나 망각된 기억이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것이 유사한 경험을 만났을 때,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고도 한다. * 어디선가 봤더랜다. 복숭아를 닮은 분홍색 후드티에 끝을 야무지게 접어올린 스키니진. 그리고 귀여움을 한껏 더해주는 주황색 비니까지. 덧붙여 빨간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 마주보고 서있는 나와 너. 그 끝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우리는 어디에선가 아니, 정확히 이곳에서 만났었다. "정국아." "왜." "왜 그렇게 멍을 때려." "모르겠네." "무슨 일 있어?" "그냥…뭔갈 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야." "뭔데? 물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