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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총/- 정진

[정진] 기다려

제약 2018. 3. 21. 22:56


#.
“으아앙~! 엄마!”
“왜 또 싸우고 그러니. 또 정국이 네가 형 괴롭혔어?”
“진형은 울보야! 맨날 울기만 해! 꾸기는 아무것뚜 안 했단말이야!”

넓지만 지나다니는 차량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를 가로지르면 바로 보이는 가파른 오르막길은 정국과 석진의 놀이터였다. 시골마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도시라고 하기에도 뭐 한 애매한 위치에 살고 있는 두 형제는 언제나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매번 싸우고 때리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몇 시간, 아니 몇 분만 지나면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금세 서로를 보며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둘은 동네에서 유명인사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

앞니 두 개 빠진 전정국과 매번 눈꼬리에 방울방울 눈물을 매달고 다니는 김석진. 둘은 이복형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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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야?”


겁에 질려 어머니의 두 다리 뒤에 서있던 정국을 보고 석진이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네 동생이야. 여기가 낯설 테니까 석진이가 잘 돌봐 줘.”
“걱정 마! 석진이는 듬직하니까!”


어머니의 말에 석진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팡팡 쳐대며 말했다. 석진의 태도에 어머니가 제 다리맡에 숨어있던 정국을 앞으로 밀어내며 다치지 않게 조심히 데리고 다니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입술만 오물거리던 정국을 석진이 가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동생은 이름이 뭐야?”
“…꾸기.”
“꾸기? 이름이 꾸기야?”


끄덕끄덕. 정국이 동그란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의 석진이 정국에게 되물었다.


“그러며는 꾸기는 김 꾸기야?”
“안니야. 꾸기는 전 정꾸기야.”
“전정국?”
“웅.”
“꾸기는 김 씨가 아니야?”
“웅. 꾸기는 아니야.”


이름 석자를 알아냈음에도 영 시원찮은 표정의 석진이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리다 물어보기를 포기했다. 귀찮기도 하고 성이 다른게 뭐가 중요해. 석진은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꾸가, 우리 요 앞에 놀이터에 놀러 가자!”




“여기가 놀이터야?”
“응, 여기는 석진이만의 놀이터야.”
“여기서 뭐하구 놀 수 있는데?”
“여름에는 자전거 타구 씽씽 달릴 수 있구, 겨울에는 땅이 꽁꽁 얼어서 썰매 탈 수 있지!”
“우와! 그러면 지금은 여름이니까 자전거 타구 씽씽 달릴 수 있겠네?!”
“응!”
“형아 멋있다!”


정국이 아이다운 함박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덩달아 석진도 웃었다. 방긋방긋, 아이들에게 담긴 미소는 한없이 순수했다.





“오늘은 뭐하구 놀 거야?”
“오늘은 엄마가 마트에 간댔어.”
“꾸기도 갈래!”
“꾸기는 아직 어려서 안돼.”
“꾸기 안 어려!”
“그래도 안돼.”
“싫어!! 꾸기도 갈 거야!!”


별안간 생떼를 쓰며 방바닥을 휘젓고 다니는 정국 탓에 부모님이 한 걸음에 달려와 그를 달랬다.


“우리 꾸기 왜 울고 있어.”
“형아가 꾸기는 안 갈 거래!”
“꾸기도 같이 가야지.”
“형아가 꾸기는 안 데려 간 댔어! 형아는 거짓말쟁이야!”


부모님의 품에 안겨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엉엉 울어대던 정국이 석진을 바라보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메롱. 석진은 저 자신이 정국 나이 때쯤에는 부모님이 마트에 못 가게 했었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똑같이 말한 것뿐이었다. 여전히 그는 부모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석진이 부모님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물었다.


“왜 꾸기는 데려가?”
“응? 정국이는 애긴데 집에 혼자 둘 수 없잖니.”
“석진이는 혼자 있었는데?”
“석진이는 형이잖아. 이 정도도 이해 못해줘?”
“….”


움켜쥐었던 옷자락에서 아이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땅에 닿을 듯 축 처진 석진의 어깨를, 눈꼬리에 이슬처럼 맺힌 석진의 눈물방울을,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형아.”
“왜.”
“화나써?”
“화 안 났어.”
“꾸기 무서워.”
“….”


작은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석진의 눈치를 보는 정국에 꼴에 동생이라고 형 대우해주는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큼큼. 잠긴 목을 다시며 석진이 정국에게 말했다.


“앞으로 형 말 무조건 듣겠다고 하면 안 무섭게 해줄게.”
“잘 들을게! 꾸기 형아 말 잘 들을게!”
“진짜지? 새끼손가락 걸어.”


석진의 말에 후다닥 한 걸음에 석진의 눈앞까지 달려온 정국이 황급히 석진의 새끼손가락에 조그마한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정국의 말랑한 웃음에 석진도 따라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워하고 싶었지만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정국의 매력인 거 같았다.





남자들의 의리라나 뭐라나, 정국은 석진과 새끼손가락 걸고 그날부터 꼬박 석진의 말에 토씨 하나 달지 않았다. 솔직히 석진은 그날 그냥 형, 동생 관계만 정리하려 했던 거였는데 착실하게 말 잘 듣는 정국을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정국은 유독 기다려.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알게 모르게 석진 또한 그 단어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항상 석진이 정국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에는 좋은 일 들이 많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금 기다리면 식탁에 밥이 차려진다거나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으면 석진이 동화책을 들고 찾아온다거나.

정국은 석진이 읽어주는 동화를 좋아했다. 잔잔한 미성의 목소리로 듣는 동화는 정국의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충분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취할 것만 같았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꾸기 자?”
“….”
“잘 자. 좋은 꿈꿔.”


탁-. 석진이 방의 스위치를 손으로 누르자, 형광등의 빛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정국의 방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정국의 숨소리만이 새근새근 들려올 뿐이었다.







#.
눈을 뜨니 보이는 건 하얀 천장이었다. 정국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윽….”


척추부터 골반까지 찌르르 느껴지는 고통에 정국이 신음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벽지든, 침대든, 냉장고든 온통 새하얀 방이었다.


“….”


정국이 온기 하나 있지 않은 방을 둘러보는 걸 포기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이 유일한 온기 같았다. 조금 더 갈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국은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다리가 사고로 온전히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재활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뭐 해. 정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리만 다쳤으면 다행이었지, 정국은 차에 부딪히면서 심장 쪽으로도 무리가 생겼다고 했다. 한창 뛰어놀 나이였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슬펐다.


드르륵ㅡ


“깼네?”


석진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새어 나오던 빛이 온전히 정국의 눈에 담겼다. 따뜻하다. 정국이 웃었다.


“응, 아까.”
“조금 더 누워있지. 오래 앉아있으면 숨쉬기 힘들다며.”
“얼마 안 돼서 괜찮아.”
“무리하지 마.”
“응.”


석진이 과일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바구니 안은 정국이 좋아하는 복숭아들로 가득했다. 정국이 아무말 없이 복숭아 하나를 집어 석진에게 건넸다. 자연스럽게 복숭아를 받아든 석진이 의자에 앉아 과도로 복숭아의 껍질을 벗겨냈다. 달달한 복숭아의 향이 병실 내로 퍼졌다. 정국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형이 맨날 복숭아 깎아줬으면 좋겠다.”
“나을 생각을 해야지. 왜 계속 있을 생각을 해.”


히히. 정국이 개구지게 웃었다. 석진도 따라 웃었다. 여전히 맑고 순수한 웃음이었다.


“엄마, 아빠는?”
“일이 조금 늦으시나 봐.”
“맨날 그렇지, 뭐.”


정국이 서운한 투로 툴툴거렸다. 왜, 나로는 부족해? 석진이 장난스럽게 정국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아니이…. 정국이 말 끝을 흐리며 말했다.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정국은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탔다. 그런 정국을 가만히 보던 석진이 입을 열었다.


“요새 부모님이 병문안을 많이 안 오시기는 했지. 정국아. 오늘만 꾹 참고 기다리면 형이 내일 부모님이랑 같이 올게, 알았지?”


석진의 말에 정국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만 기다리면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석진이 정국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기다려였다.






“우리 국이!”


누워있던 정국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낸 정국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한 걸음에 정국이 누워있는 침대로 달려온 어머니가 정국을 품에 안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모님의 온기에 정국이 어머니의 품에 가만히 고개를 묻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괜스레 석진까지 찡해지는 느낌이었다.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아버지가 말없이 석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렸다. 석진이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엄마가 계속 못 와서 미안해. 우리 정국이 외로웠지?”
“아냐. 형이 옆에 계속 있어줘서 안 외로웠어.”
“정말? 다행이다. 석진이 형이 정국이를 많이 아끼나 봐.”
“응. 나도 석진이 형 많이 아껴.”


정국이 고개를 들고 석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석진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정국 또한 그에게 미소로 답했다. 콜록콜록ㅡ 문득 정국이 때아닌 기침을 해댔다. 갑작스러운 정국의 기침에 당황한 어머니가 정국을 품에서 떼어내고 안색을 살폈다. 순식간에 새파래진 정국의 입술이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정국아! 정국아! 심호흡 좀 해봐! 어머 얘, 석진아! 의사선생님 좀 불러와, 빨리!”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석진에게 말했다. 그에 석진 또한 다급해진 발걸음으로 황급히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의사와 간호사들을 닥치는 대로 불러들인 석진이 정국이 있을 병실로 되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병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이미 하얀 침대 시트는 정국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콜록콜록ㅡ 계속되는 기침에 정국의 목이 무리를 했는지, 결국 피토를 하고만 것이었다. 입을 가린 손부터 시작해서 팔, 가슴, 허벅지까지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대로 가면 과다출혈도 못 막아! 당장 인공호흡기 가져와!”


의사의 외침에 한 간호사가 부리나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급한 대로 정국을 침대에 눕힌 의사가 숨을 최대한 천천히 쉬어보라며 정국에게 말했다. 새빨개진 얼굴의 정국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꺽꺽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인공호흡기를 가져온 간호사가 의사에게로 호흡기를 건네주었다. 익숙하게 호흡기를 정국에게 부착시킨 의사가 버튼을 누르자, 꺽꺽대던 정국이 멈췄던 숨을 몰아쉬며 후우욱ㅡ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에 부모님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들바들 떨리는 정국의 손을 붙잡았다.


“선생님, 우리 애 괜찮은 건가요…?”
“…환자분은 안정이 필요하니 밖에서 얘기합시다.”


의사의 말에 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곤 석진에게 말했다.


“석진아, 네가 정국이 옆에 좀 있어줘라.”
“네.”


정국은 흐려지는 정신에 의사들과 함께 병실을 나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네…?”

석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뭐라고…?


“정국이가 어제 일로 심장에 무리가 와서 심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심장이 제 기능을 하긴 어려울 거 같대….”
“….”
“어쩌면 좋지, 석진아…. 어쩌면 좋아…?”


울먹이는 목소리의 어머니가 석진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품에서 흐느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병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석진도 조용히 속으로 울음을 삼켜내었다.


“조금…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무슨 소리야?”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무슨 생각을 한다는 거야, 네가.”


아버지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석진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버지가 석진의 어깨를 붙잡고 되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정국이는 제 동생이에요.”
“넌 내 아들이기도 해.”
“….”
“뭐가 먼저인지, 네가 생각하는 게 옳은 행동인지, 그른 행동인지. 제발 되돌아봐라.”
“…저는 괜찮아요.”
“뭐?”


이해가지 않는다는 말투로 아버지가 물었다.


“저는…외로움은 잘 안타니까…정국이는 많이 타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당장 급한 건데 심장이식이 어디 쉬운가요.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오래오래 안 올 것 처럼 하다가 조금 아쉬워질 즘에 오면 되죠.”
“….”
“정국이는 외로움 많이 타서 이런 거 잘 못 기다려요.”
“석진아.”
“항상 생각했었어요. 왜 늘 전정국만 먼저일까. 솔직히 억울하고 화도 많이 나고 많이 미워했어요. 나도 엄마, 아빠 아들인데. 왜 아들은 전정국 하나인 것만 같은 느낌이지.”
“….”


석진의 말에 두 부모 모두가 뻐끔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냥 이해하는 척 묻어놓기로 했죠. 착한 아들인 마냥 동생 잘 챙기라는 부모님 말씀 꼬박 잘 듣고, 동생 잘 보듬어 달라는 부모님 말씀 또 꼬박 잘 듣고.”
“…석진아.”
“아무래도 저보단 정국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저보다는 정국이가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석진이 눈에서부터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아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붉어진 눈가가, 흔들리는 동공이, 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느껴왔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옳지 못해. 우리 지원자가 나타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응?”


아버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석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계속 안 나타나면요?”
“….”
“그땐 어쩌실 건데요?”
“….”
“그게 더 비참하다고요. 지금 제가 결심했을 때. 제발 그냥 하게 해 주세요.”
“…후회 안 할 자신 있니?”


아버지의 물음에 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의사선생님께 말씀드릴게요. 석진이 회피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후우욱ㅡ 후욱ㅡ 인공호흡기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있던 정국이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감겨있던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보이는 석진의 모습에 정국이 힘겹게 그를 불렀다.


“…형.”
“…어, 정국아. 깨웠어? 미안.”


도리도리. 정국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왔어. 정국의 물음에 석진이 어물쩍 대답했다. 으응, 얼마 안 됐어.


“무슨 일 있지.”


심상찮은 석진의 분위기에 정국이 날카롭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 석진이 대답을 회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말해주면 안 돼? 정국이 손가락으로 그의 옷 끝자락을 겨우 붙들고 묻자, 석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좋은 소식, 안 좋은 소식. 각각 한 가지씩 있어. 뭐부터 듣고 싶어?”
“…안 좋은 거.”
“정국이 네 심장에 무리가 와서 더 이상 심장이 제 기능을 하긴 어렵대. 그래서 이식을 해야 한대.”
“…. 좋은 거는?”
“…근데 딱 심장이식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거야.”
“정말? 이렇게 바로?”
“그래. 너는 행운아야, 인마. 수술은 바로 내일 아침이래.”


정국이 웃었다.


“더 이상 형이 안 힘들어도 되겠다.”
“…그렇네.”
“이제 그럼 재활치료만 열심히 받으면 되겠다. 형 내가 빨리 다 나을 테니까 나 다 괜찮아지면 그때 또 같이 놀자.”
“응…. 우리 정국이 오늘 하루만 기다리면 정말 건강해 지겠네.”
“응!”


실로 행복한 웃음이었다.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눈물을 감추며 석진도 따라 웃었다. 더 이상 그의 웃음은 순수한 웃음이 아니었다.


“정국아, 오늘은 늦었으니까 얼른 자. 잠만 자고 일어나면 건강해질 거야. 형이랑 자주 하던 숫자 세기 놀이 있지? 그거 하면서 기다려. 잘 자고 좋은 꿈꿔, 내 동생.”
“응. 형 꼭 내일 나 보러 와야 돼, 알았지?”
“…응.”
“약속해!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정국이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석진에게 말했다.


“약속.”


석진이 정국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겹치며 말했다. 잘 있어, 내 동생. 사랑해. 마지막으로 보는 정국의 얼굴을 눈으로 열심히 담아낸 석진이 병실 문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흐느꼈다. 모든 게 마지막이었다.






“석진아.”
“….”
“미안해.”
“….”
“미안해, 내 아들.”


유리창 너머 어머니가 석진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석진이 제게 수술복을 입혀주던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곤 유리창으로 다가섰다. 들리진 않지만 입모양 만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
‘저는 그거면 돼요.’
“…사랑해. 사랑해, 석진아.”


끄덕.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유리창에서 멀어지는 석진의 모습에 결국 어머니께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술실로 이동하겠습니다. 침대 위로 누워주세요.”


이제 석진의 눈앞에 보이는 건 천창에 달린 하얀 조명뿐이었다. 정국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이 불빛들을 봐왔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술방으로 옮겨진 석진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하실 말 있으세요?”
“…아니요.”


두 눈이 감기는 순간까지, 나는 열심히 두 눈에 너를 담았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너의 모습을.




.
.
.
.
.
.



#.
“정국아, 몸은 좀 괜찮니?”


처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역시 하얀 병원 천장이었다.


“으응.”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자, 부모님의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형은?”
“…형은 학교 갔지.”


아. 벌써 개학 시즌이구나. 정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학교 끝나고 오려나?”
“형도 이제 공부해야지. 엄마가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
“형이랑 약속했단 말이야. 오늘 꼭 오기로.”
“….”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어. 나는 옛날에 손가락 걸고 약속한 거면 다 지켰으니까 형도 지킬 거야.”


정국이 굳게 믿는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부모님의 표정은 눈치채지도 못하는 듯 했다.

다음 날이 돼도, 그다음 날이 돼도. 오지 않는 석진에 정국이 투정을 부렸다.


“형은 왜 안 와?”
“정국이가 투정 안 부리고 재활치료 끝날 때까지 꾸준히 엄마 말 잘 듣고 있으면 그때 온대.”
“정말? 진짜지?”


그럼. 어머니의 말에 정국이 그럼 나 열심히 할게. 하고 말했다. 열심히 할 테니까 꼭 형 데려오라고. 내가 다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알겠다는 확답을 두세번은 더 받아낸 뒤에야 정국이 웃었다.










“거짓말쟁이.”


재활치료라면 벌써 오래전에 끝났는데. 정국이 찍은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심장이식을 받고 재활치료도 완벽하게 끝낸 지 10년은 족히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옆에 석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암묵적으로 정국도 느꼈다.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겠구나. 더 이상 그와 함께 얘기를 나눌 수도, 더 이상 그와 함께 웃으며 뛰어놀 수도 없겠구나. 어느 한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항상 그가 기다려달라고. 그 말 한마디면 안 좋았던 일도 좋은 일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만들어졌었는데. 이제 그는 옆에 없고 더는 기다려달라고 말해주던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 정국은 기다려 달란 말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겨울 되면 같이 썰매도 타자면서….”


창문 너머로 내린 하얀 눈송이들이 소복소복 쌓이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옛날이라면 신이 나서 썰매를 들고 뛰쳐나갔을 정국이었지만 그건 다 옛날일 뿐이라지. 지금은 그저 내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석진에게, 정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도 여기서 이렇게 너만을 기다린다고. 내 가슴속 평생을 자리 잡은 그대에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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