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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의 손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그를 닮은 정갈한 꽃들로만 장식된 단정한 꽃다발. 나는 그의 순수한 면이 좋았다. 예뻤다. 가지고 싶다고, 내 걸로 만들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태형아."

그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여지없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체 못하고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그에게까지 전해질까봐 늘 마음을 조렸다. 그는 항상 나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로 온화하게 웃었다. 그런 미소를 눈에 담고 있자면 마음까지도 편안해 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지민이를 만났어.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해서 내가 늘 질투했잖아."

그가 어설프게 질투할 때면 귀여운 마음에 더 못되게 굴곤 했는데. 이제 와서 미안해 해봤자 다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지민이도 너를 많이 좋아했었지. 나는 가끔 생각했어. 너희가 정말 친구가 맞을까…하고."

그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근데 친구는 맞더라. 너 지민이랑은 섹스 안해봤잖아."

아, 나 지금까지 굉장히 무드 있었는데. 저 형은 분위기 파악할 줄 모르는게 문제다. 태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랑 늘 같이 있을 때면 마음이 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함부로 대했던 거 같아. 미안해."

석진이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을 땅 위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애초에 내가 처음부터 한결같이 널 대했다면 지금은 네가 여기 있을까."

석진의 말에 태형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묵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석진조차 입을 다문 채 요지부동으로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석진이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내가 미안해…. 그 때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게 아니였어. 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여서, 아니…이건 변명같으니까 말 안할래."

석진이 횡설수설대며 입을 쉴새없이 움직였다. 석진의 말을 조용히 곱씹던 태형은 과거를 회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해가 져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마지막은 형과 함께 보내서 다행이야. 그 때 구급차 안에서라도 눈뜨지 못했다면 형 예쁜 얼굴도 못보고 억울하게 떠났을테니까.

태형은 혼자 생각에 잠겨 허공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
그 날은 석진과 태형은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서운한 감정들을 털어놓았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끝은 여느 때와 똑같이 싸움으로 끝이났다.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과 화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석진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고 태형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질질 짤거면 나 간다."

차마 자존심 때문에 태형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석진에 태형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짐을 챙겨 포차 밖으로 걸어나갔다. 콧잔등이 시려오는 느낌에 태형이 하늘을 올려다 보자, 하늘에선 하얀 눈송이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첫 눈 오는 날에 애인이랑 싸웠네."

태형이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웃긴다, 진짜... 헛웃음이 나왔다. 실은 오늘 싸운 것도 별 거 아닌 일인데. 왜 우리는 늘 싸우는 걸까. 왜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는 걸까. 결국에 상처받는 건 양쪽 다인데, 어느 누구하나 양보하지 못해서 번진 싸움이 서로의 마음을 후벼파고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태형이 자켓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으며 한 손으로는 휴대폰 자판을 두들겼다.

[박지민. 문 열어놔.]

문자를 보낸 나머지 손 마저 자켓 주머니에 꽂고 태형은 자리를 떠났다. 미련도 없다는 발걸음으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자리를 떴다.

홀로 포차 안에 앉아있던 석진의 울음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마침내 울음을 그친 석진이 상 위에 올려져있던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태형에게 온 전화도, 문자도 없는 걸 확인한 석진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마저 슥슥 닦아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정국아.
- 진형?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석진은 또다시 눈앞이 눈물로 가려졌다. 아이씨…안 울고 싶은데. 석진이 제 앞을 가려오는 눈물에 눈을 벅벅 문질렀다. 미세하게 떨려오는 석진의 목소리에 직감한 듯, 정국이 말했다.

- 형 지금 어디에요.



*
어서 오세요. 포차 주인 아주머니께서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하시는 인삿말이었다. 석진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찾아온 손님이 정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형. 그만 마셔요."

오자마자 저를 제지하는 정국의 손길에 괜시리 심술이 났다.

"네가 뭔데 하라마라야…김태형도 안그러는데…."

"지금 형 많이 취했어요. 제정신 아니잖아요."

석진이 소주잔에 담긴 술을 입안으로 들이키려하자, 정국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몽롱한 눈빛으로 정국을 쳐다본 석진이 알코올에 취했는지 정국을 향해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정국이 같은 애인이면…행복할 거 같다…."

석진의 말에 그를 일으켜 세우던 정국이 행동을 멈추곤 그를 바라봤다.

"형은 진짜 이기적이네요."

"뭐가…."

잠시 고민하던 정국이 석진이 따라놓았던 술을 벌컥 들이키곤 입을 열었다.

"맨날 태형이형이랑 싸우고 화풀이는 나한테 하고, 맨날 나만 찾으면서. 형 취하면 제일 먼저 연락하는게 나면서. 왜 결국에 끝은 태형이형이에요? 왜 난 안되는데요?"

정국이 석진을 향해 울화통을 터트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는지 석진은 정국에게 안긴 채로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됐어요. 오늘은 데려다 줄 기분 아니니까 혼자가요."

정국이 제 어깨에 걸쳤던 석진의 팔을 풀더니 휑하고 포차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국아, 정국아!"

석진의 부름에도 정국은 애써 무시했다. 이런 역할은 이제 진절머리가 났으니까. 짝사랑이 이렇게 힘들구나. 정국은 뼈져리게 느꼈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상대인 사람이 자신의 애인과의 갈등으로 저를 불러다 놓고 하는 신세한탄이라니. 정국은 이 지긋지긋한 3년 간의 짝사랑에 끝맺음을 맺고 싶었다. 그렇기에 석진의 부름에도 못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정국이 떠나간 자리에 석진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방금 전 정국의 고백아닌 고백에 적잖게 충격받은 석진은 취하기 위해 마셨던 술이 다 깨어버린 기분이었다. 계산을 하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나온 포차 밖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뭐야…눈 왔었네."

석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김태형 이 나쁜새끼…. 첫 눈 오는 걸 지 혼자 봐? 여기 덩그러니 애인 냅두고?

괜히 또 울컥해지는 마음에 석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박자박. 첫 눈 치고는 제법 소복히 쌓인 눈을 밟으며 석진은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
우웅ㅡ우웅ㅡ

"야…태태야. 전화 울린다."

"아…누구야."

태형이 싸한 머리를 부여잡고 휴대폰을 고쳐잡았다.

- 여보세요….
- 김태형 이 개자시가!!

수화기를 뚫고 나올법한 우렁찬 목소리에 태형이 제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냈다.

- 양심뚜 없는 새끼야아….

알코올에 잔뜩 쩔어있는 익숙한 목소리에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 왜요.
- 너 어디야!
- 박지민 자취방이요.
- 너어 거기 딱 이써라. 형이 금방 차자갈꺼니까.
- 찾아와서 어쩔건데요.

태형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대꾸없이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 대답없으면 저 끊어요.
- 잠깐만!

태형이 휴대폰에서 귀를 떼어내려하자, 석진이 다급하게 태형을 불러세웠다.

- 나와…만나서 얘기하자.
- 형이랑 할 얘기 없어요.
- 우리 맨날 만나던 공원으로 와.

태형이 싫다고 거절할까 두려워 제 할 말만 딱 하고 끊어버리는 석진에 태형은 연거푸 마른세수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제 더 싸울 힘도 없으니까. 태형은 바닥에 나뒹굴던 패딩 하나를 집어들었다.

"가냐?"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올게."

태형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한 말이었다. 여전히 내리는 눈에 태형은 제 손에 들린 핫팩을 흔들어재끼며 걸음을 서둘렀다.




*
석진은 태형에게 전화를 걸기 전부터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겨 묵묵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간 태형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는 설레였던 일들이 지금은 너무 익숙해 졌고, 그 때는 감동적이고 고마웠던 일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져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에 설레여야 할 일에 무심하고, 감사해야 할 일에 당연한 듯 지나왔던 것이었다. 석진은 다시금 되내이며 생각했다. 조금만, 서로 조금만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형!"

석진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허공에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고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하며, 소중하고 너무나도 익숙한. 제 삶에 일부가 되어버린 태형이 서있었다.

신호등을 사이로 둘의 거리는 불과 몇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울컥,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석진이 마를 새 없는 제 눈가를 비벼대며 태형을 불렀다.

"태형아!"

잔뜩 젖어있는 석진의 목소리에 태형이 대답했다.

"왜 또 울고 있어요!"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정말 많아!"

"그 쪽으로 갈테니까 기다려요!"

"아니! 나는 지금 말해야 돼!"

석진이 태형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알코올에 취해 가누기 힘든 몸을 이끌고 태형을 향해 걸었다. 자꾸만 올라오는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무작정 걸었다.

"형 지금 빨간 불이에요!"

태형의 다급한 외침에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석진이 그 외침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비틀대는 몸을 힘겹게 이끌고 몇 발자국 안남은 걸음을 떼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 라이트의 불빛이 석진을 집어삼키자, 시야가 흐려진 석진은 그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석진형!!!!"


끼이이이익ㅡ 쾅ㅡ!




*
차에 치였다기엔 너무나도 멀쩡한 정신에 석진이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제일 처음 보이는 건 별이 예쁘게 박힌 밤하늘에 하얗게 내려오는 눈송이들 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상처 하나 없는 몸을 석진이 일으켰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이미 도망치고 없는 뺑소니 운전자와 빨간 장미가 가득핀 정원에 누워있는 듯한 태형의 모습이었다.

"ㅌ, 태형아!"

황급히 일어나 태형에게 달려갔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겨우 멈췄던 눈물이 금방 또 차올랐다.

"태형아, 태형아!"

대답따위가 돌아오지 않아도 그를 애타게 불렀다. 내 마음 하나 전하겠다고.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왜 나는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도 못기다릴만큼 조급해 했을까.

차오르는 눈물이 앞을 가려도 그냥 계속 울었다. 그를 붙잡고, 감겨있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냥 계속 울었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119에 신고를 했다. 다급하게 구급차가 달려와 태형이를 싣고 응급실에 도착한 후에야 눈물이 멈추었다. 정확히 말하면 멈춘게 아니라 더 나올 눈물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욱 더 정확했다.

김태형 때문에 쏟은 눈물만 몇리터인가. 석진은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바라면서.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걸어나왔다. 마스크와 수술복에 잔뜩 묻어있는 혈흔에 석진의 불안감은 더욱이 고조되는가 싶었다.

"태형이…태형이 어떻게 됐어요?"

석진이 떨리는 몸을 가다듬고 물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주세요."

그의 말에 석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더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또 눈가를 가득 메꿨다. 온 몸의 물이란 물은 죄다 눈물로 빠져나오겠다는 마냥 쉴 새 없이 닭똥같은 눈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석진은 그 날 처음 소리내어 울었다. 목이 찢어져라, 땅이 꺼져라 큰 소리로 울었다.

모든게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태형을 공원으로 부르지만 않았어도,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지만 않았어도, 빨간불임에도 불구하고 태형을 향해 뛰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처참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결국 이런 결과를 낳게 된 마음조차도 전하지 못하게 됐다.

석진은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음에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자신때문에 죽음으로 몰리게 되었다는 건 그 어느 누가 생각해도 가슴아픈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태형은 석진의 곁을 떠났고,
석진은 태형을 곁에서 떠나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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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이 떠나간 뒤로 석진은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죗값을 치르기라도하듯, 석진은 집과 묘지만을 오갔다. 석진은 오늘도 여전히 꽃다발을 들고왔다. 형을 닮은 순수하고 정갈한 꽃다발이었다. 나는 형의 그런 순수한 면이 좋았다.

석진이 눈물을 훔쳤다.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던 태형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보이지 않지만, 들리지도 않지만 태형은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를 위해 울어주세요.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세요. 그 눈물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당신의 기억 언저리에 늘 나와의 추억이 함께 하기를.

석진의 머리 위로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올해 들어 내리는 첫 눈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시린 겨울이 찾아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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