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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칫솔은? 챙겼어. 치약은? 그것도. 태형의 물음에 석진이 대답했다. 그렇게 당연한 건 안 물어 봐도 돼. 석진이 입술을 잔뜩 내밀곤 툴툴거렸다. 형은 그런 당연한 것도 못 챙기니까 물어보는 거에요. 태형의 말에 석진이 할 말을 잃고 조용히 내밀었던 입술을 집어넣었다. 짐 다 챙겼으면 출발해요. 이러다 열차 놓치겠어요. 태형이 제 몸집만한 가방을 어깨에 걸쳐매며 석진에게 말했다. 어어, 그래.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짐들을 마저 가방에 구겨 넣은 석진이 대답했다.


놓고 온 거 없죠? 안전벨트를 매던 태형이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또 누구냐. 나 김석진이야ㅡ태형이 확인하듯, 재차 되물었다. 진짜 없어요? …뭐 두고 왔나? 그제서야 태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 석진이었다. 손 내밀어 봐요. 태형은 가지고 있던 것을 석진이 내민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어, 이게 뭐야? 석진이 태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에 형이 하고싶다고 했던 커플목걸이. 태형의 대답에 예상치 못했다는 듯, 석진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어, 고마워... 미안해요, 예전에 줬어야 했던건데. 사실 지금 줘봤자 의미없는데…. 그쳐? 태형이 장난어린 말투로 얘기하자, 석진이 손사례를 치며 말했다. 아냐! 나 지금...진짜...행복해. 석진의 말에 태형이 그래요? 하며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로 웃어보였던 너의 그 얼굴에 내가 반했던 걸지도. 석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너의 모든게 좋으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너라서 좋은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형!"

ㅇ, 어? 태형의 부름에 석진이 깜짝 놀라 몸을 바르작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길래 불러도 몰라요. 아...미안. 그래도 네 생각 했으니까 봐주라. 제 생각은 당연히 맨날 해야죠. 태형의 당당함에 석진이 기가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 잘나서 좋겠다! 너 다해라! 이런 제가 형 애인이잖아요, 어때요. 좋아요? 태형이 석진을 바짝 끌어당겨 이마를 맞대곤 말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듯한 거리에 석진이 긴장한듯, 몸에 힘을 가득 주었다. 장난이니까 힘 좀 빼요 형ㅡ 말을 마친 뒤 태형은 석진의 허리에 둘렀던 제 팔을 빼내었다.


그런 태형의 태도에 석진이 표정을 굳히곤 말했다. ...너는. 네? 너는, 다 장난이야? 내 마음이 어떤 지도 모르면서. 석진이 울먹이는 소리를 내며 태형에게 소리쳤다. 우린 지금!, 쉿. 석진의 말을 가로막은 태형이 저의 검지손가락을 석진의 입술에 살포시 올리곤 말했다. 우린 지금 여행 온 연인이에요.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우리한테는 필요없어요. ...그냥, 지금은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걸로 즐겨요. 조용히 미소짓는 얼굴과 달리 태형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서려있는 듯, 조용하고 잔잔했다. 그런 태형에 석진도 더이상 별 대꾸 하지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바다구경이나 갈까요? 펜션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않아 태형이 물었다. 그래, 짐도 다 풀었으니까 잠깐 갔다오자. 석진이 그에 답하며 가방을 뒤적였다. 뭐 찾아요? 태형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석진에게 물었다. 이거. 석진의 손에 붙들려 가방 속에서 빠져나온 것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어, 언제 챙겼어요? 챙기는 거 못봤는데. 태형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나도 챙길 땐 챙기는 사람이야. 얼른 나가기나 해. 네네ㅡ 석진에게 등 떠밀려 나온 태형이 고개를 들어 바다 너머 수평선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라면 저기일까. 태형은 짧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안가 생각을 관뒀다. 뭐해? 나가라니까 진짜 나가있기만하네. 제 옆에는 이렇게 예쁜 애인이 있으니까, 저런 곳은 갈 필요 없으니까. 태형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형. 형은 근데 저랑 왜 사겨요? 문득 바닷가를 거닐던 태형이 석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잘생겨서? 석진이 대답했다. 그게 다에요? 그럼 넌 나랑 왜 사귀는데? 예쁘니까요. 똑같네 뭐. 석진의 말에 태형이 푸스스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여기서 사진찍을까? 석진이 제 손에 들려있는 카메라를 톡톡치며 말했다.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바다를 뒤로하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타이머 맞추고 와요 형. 말 안해도 알아 임마. 석진이 능청스레 웃으며 말했다. 몇초에요? 5초. 뭐야 너무 길다. 시간 아까운 줄 모르네.

"......"

"......"

ㅡ미안해. 석진이 조심스레 태형에게 말했다. 형이 왜 사과해요, 내가 괜찮은데. 그리고 형 말이 맞지. 시간은 소중하죠. 머뭇거리다간 사라져버리고 말테니까. 태형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가하더니, 금방 지워버리곤 말했다. 아ㅡ 형 때문에 사진도 제대로 못 나왔겠네. 얼른 다시 타이머 맞춰요. 태형의 말에 석진이 후다닥 카메라를 향해 뛰어갔다. 이번엔 제대로 찍자. 그럼, 당연하져. 석진이 타이머를 맞추고 태형의 옆으로 돌아오자, 태형은 있는 힘껏 석진을 껴안았다. 야아, 숨막혀! 석진은 태형에게서 벗어나기위해 바둥거렸다. ...평생 형 옆에서 이렇게 있고싶다. 태형의 말에 그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태형아."

"그냥 계속, 여기서 둘이 이렇게 살고싶다."

"태형아?"

"아무한테도 방해 안받고, 여기 매일 이렇게 걸으면서 둘이 오붓하게 얘기도 하고."

"태형아!"

그냥 그렇게 형이랑 둘이 살고싶다. 물기 어린 목소리에 석진이 태형을 마주보려 돌아섰다. 예상대로 태형은 붉어진 눈시울로 석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형아. 석진의 부름에 태형이 옷소매로 제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미안해요. 괜히 내가 분위기 다 망치네. 그런 거 아니니까 내 말 들어. 석진이 태형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너 아니였으면 이런 감정 꿈도 못 꿨을거야. 너로 인해 행복해졌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그러니까 그 미래엔 당연히 네가 있을거고.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벌써부터 연연하지마. 그러기에 너는 아직 어리니까. 석진이 제 등치만한 태형을 품에 끌어 안았다. 태형의 눈물이 바닷물이 되어 함께 떠내려가기를, 울먹이는 소리가 바닷소리에 뭍혀 허공으로 흩어지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석진은 태형을 다독였다.



*
우와. 저 어제 너무 울었나봐요. 태형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깔깔대며 석진에게 말했다. 어제 너 달래주느라 바다구경도 제대로 못했잖아. 그니까 오늘은 울지말고 나랑 같이 바다구경하자. 밤에는 불꽃놀이도 하고. 석진이 설거지를 하며 무심한 듯 툭툭 내뱉었다. 와. 좋아요. 불꽃놀이. 예쁘겠다. 아이마냥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태형에 석진이 살풋 웃었다. 저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석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 태형이 망설임없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변기를 붙잡곤 속을 게워냈다. 콜록콜록. 연거푸 기침만 해대던 탓에 태형의 손바닥은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형, 저 어떡하죠. 형이랑 불꽃놀이 같이 하고 싶었는데. 보는 것만이라도 좋은데...안될 거 같아요. 태형이 흐려지는 시야를 뒤로한 채 까마득 정신을 잃었다.

.....

들어간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좀처럼 나오지 않는 태형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석진이 조심스레 문을 두들겼다. 태형아, 안에 있어? 불러도 대답없는 너머에 잔뜩 겁에질린 석진이 다급하게 제 휴대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무사하기를. 아직은 가기엔 이른 시간이니까. 조금 더 곁에 머물러주기를. 석진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님, 이쪽이에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응급실 앞으로 걸어온 중년의 여성이 석진을 발견한듯 석진을 향해 다가왔다. 짝ㅡ

그리곤 망설임 없이 석진의 왼뺨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내가 너 사고 한번 칠 줄 알았다. 너 내가 만만하니? 그렇게 헤어지라고 눈치를 줬겄만, 이제는 아픈 애를 데리고 여행을 가? 너 진짜 미친거니? 여성의 말에 석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연거푸 '죄송합니다.' 라고만 내뱉을 뿐이었다. 우리 태형이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는 걸로 알고 있으라구.



매서운 눈빛으로 석진을 잔뜩 노려보던 여성은 분이 삯히지 않는 듯, 씩씩대며 자리를 떴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오던 석진은 그제서야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참아왔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네가 잘못된다면 나를 비롯한 모두가 너의 슬픔을 애도할 것이 분명했다. 너는 나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따스한 햇살같은 존재였으니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차라리 지금 응급실에 누워있는게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그랬다면.


'형이 있기에 내가 행복한거야. 형이 없었다면 난 햇살조차 되지 못했을거야.'


그래. 너는 분명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없었다면 너는 나의 존재를 내가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웠을테지. 애초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말따위 보지 않았어도 될 것을. 지금 후회해봤자 늦었단 걸 알지만 머릿속으로는 되내이고 또 되내었다.

간절한 소망이 신에게 닿기를.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 가기를.



*
'심박수도 호흡도 모두 정상이에요. 오히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게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한 일인걸요.'

태형아, 내 말이 들린다면 대답해줄래. 날, 사랑하니? 나는 널 아주 많이 사랑해. 하지만 내 곁에 있으면 넌 불행해지고 말겠지. 사랑하기에 보내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석진이 살풋 웃으며 미동없는 태형의 손을 맞잡았다. 사실은 붙잡아 달라고 애원하는 걸지도 모르지. 석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속으로 되집어 넣었다. 그리곤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얼른 말해줘. 날 사랑해?


"...형은."

"......"

"...늘 제멋대로네요."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태형은 석진을 향해 말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힘에 겨운지 태형이 다시금 눈꺼풀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 날이 제가 형한테 반했던 날인데. 기억이 안나지 않을리 없었다. 석진에게도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 날 형이 입었던 반짝이는 옷, 진짜 예뻤었어요. 태형의 칭찬에 석진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 때 처럼 나만큼 좋은사람 만나면 좋겠어요. 뜬금없는 태형의 말에 석진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석진의 물음에도 조용히 눈을 감고 한동안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던 태형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형은 내가 아무렇지 않은데도 여기 누워있다고 생각해요? 태형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석진이 재차 되물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에 태형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해요.


아, 형 아파요. 석진이 쥐고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아팠는지 태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미안. 서둘러 태형의 손을 내려놓은 석진은 당황과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떨리는 그의 손과 불안한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형한테 통보하듯이 말해서 미안해요. 형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그랬어요. 석진의 안색을 살피던 태형이 말했다. 같이 있을 때 행복하고 좋았으니까. 그게 사라지는게 무서워서. 마냥 그렇게 있고만 싶어서. 아프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했어요. 여전히 굳어있는 석진의 손을, 이번엔 태형이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형을 사랑하니까. 소중한 내 사람이라서. 태형이 석진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석진이 봤던 태형의 웃는 얼굴 중 가장 밝고 순수한 모습으로. 태형이 외쳤다.

'사랑해요.'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태형의 의지가 아닌 석진의 의지로. 삐ㅡ 귀를 찌르는 기계음 소리에도 석진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태형과 함께 시간도 멈춘 듯이,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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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앉아 가만히 저무는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에 맺히는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나를 집어삼킬 듯 커져오는 거 같았다. 태양이 부끄러워 모습을 감추고 어둠으로 물듬과 동시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달이 떠 있는 고요한 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같이 고요해져 내가 마치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렇게 무력하고 나약하기만 했던 나인데, 너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일 뿐인데. 그런 너 없이 내가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우린 정말 남이 될 수 있을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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